CEO 의 삶
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새끼 토끼 한 마리로 농업과 인연을 맺다.
초등학교 6학년 13살 때 집에서 기르던 암토끼 한 마리를 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았다. 잘 길러 어미가 되면 새끼를 생산해 내다 팔아 학용품을 사라는 것이었다. 흰색에 빨간 눈을 가진 녀석을 위해 나는 열심히 풀을 뜯어 먹였다.
가을철 어미가 되어 새끼를 낳았는데 너무나 예쁜 녀석들을 오일장에 내다 팔았다. 이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농업의 매력에 빠져 버렸다.
중학교를 진학했더니 농업이란 과목이 있었다. 나는 너무나 재미있었다. 중학교 재학시절 점점 농업의 깊은 맛에 빠질 때쯤 고등학교를 대구 농림(자연과학)고로 결정하였고 삼촌의 권유로 원예과를 진학했다.
농고 진학으로 농업인의 길을 택하다.
재학시절 우수 농고생 농민 후계자 육성 자금을 받게 되었고, 그 돈으로 나는 7마리의 흑염소를 길렀다. 이후 고3 때 한우로 종목을 바꾸어 농업인의 길을 다짐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는 한국마사회에 취직해 말을 사육하며 지냈다. 기수가 꿈이었지만 신체적으로 적합하지가 않았다. 이후 군엘 가게 되었는데 원예자격증(종자 기능사) 때문에 2군사령부 원예병으로 발탁이 되어 또다시 사령관 관사 원예병으로 파견 근무를 하며 유리온실에서 고이 자라고 있는 난초와의 첫 만남을 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군에서 난초 관리병으로 난과 인연을 맺다.
관사에서 근무할 때(1988.10-1989.04)다행히 난들이 잘 자라 주었다. 당시 부대 내에 한국 춘란의 전문가가 있었는데 김창환 대위였다. 김 대위를 만나서 한국 춘란을 알게 되었는데 그와의 첫 만남인 그의 숙소 거실에 놓인 벌브 틔우기를 한 호 복륜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후 내가 한국 춘란 복륜 전문점(1997-2002.)을 열게 된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89년 4월 전역할 때쯤 김 대위님과 공관장님의 권유로 나는 원예전문점을 차리기로 했다.
창업에서 첫 실패.
89년 4월 전역해 창업 자금 100만 원을 만들어 대구시 달서구 진천동 대로변에 7평짜리 비닐하우스를 차렸고 관엽과 한국 춘란을 취급하였다. 당시 춘란은 채집해서 판매하였는데, 자동차가 없어 이웃 꽃 가게나 주변 난원의 주인들과 산채를 많이 갔는데, 밀양에서 산채 한 중투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규모도 작고 옳은 난도 없어 삶이 궁핍해 여름엔 냉차를 팔았고 겨울엔 군고구마를 팔아야 했다. 그러던 와중 한 고객께서 나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젊은이 난초를 제대로 배워서 난 장사를 해야 해 이웃 일본은 3-4대씩 기술을 쌓아가며 난원을 한다구..........
나의 스승님
이후 나는 스승님이신 정정은 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꾀를 짰다. 스승님께서 다니시던 볼링장에 위장 취직을 해 인연을 맺어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93년 하나밖에 없는 제자로 입문해 스승님에게서 하나하나 기술을 연마 해 나가 1년 반 동안 차근차근히 배워 나갔다. 95년 하산을 명받고 나서도 1년의 기간 동안 원격 지도를 해 주셨다. 스승님은 농대 원예학과를 나온 터에 장기간 현장 경험을 융합하신 분이셨기에 나는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하산할 때 스승님께서는 나에게 3가지를 주문하셨다.
1. 속이지 마라. 2. 일인자가 되어라 3. 대학을 가라.
지하철 참사 피해
95년 1월 하산 후 3월 1일 결혼과 함께 개업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진천 원예라는 최초의 명칭에서 한국 춘란 전문점인 “관유정”이란 이름으로 난원을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자그마하게 차렸는데 창업 비용이 없어 폐물을 되팔아 만든 몇 백만 원으로 차린 기억이 난다. 월 10만 원의 점포 임대료를 내며 차린 난원은 1995년 4월 28일 상인동 가스폭발 참사로 인해 부서진 유리 파편으로 난원은 큰 손해를 입게 되었다.
시너 냄새 몰살
95년 유리 파편 피해의 트라우마가 있는 곳을 벗어나려 열심히 한 탓에 조금 넓은 점포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달서구 도원동 소재의 신축 건물로 이전해 근사한 난원을 차렸다. 그러나 또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신축 건물의 환경 호르몬과 옆 점포의 인테리어 시너 냄새로 난초는 서서히 시들어 가 버렸다.
인건비 없어 직접 짓다 날아감
나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어렵게 전세 보증금 2500만 원만 건지고는 가구나 세간을 모두 버리고, 난초가 잘 자랄 수 있는 농장을 짓기 위해 1997년 봄 달서구 도원동 보훈병원 맞은편 논을 임대해, 60평의 비닐하우스를 인건비가 없어 직접 지었는데 부실시공으로 인해 바람 부는 날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돈을 다 써 버렸고 거지가 되었다. 주변 고객들의 도움으로 다시 하우스를 지었고 열심히 해 2001년 빚을 다 갚았고 난초 보유량도 수천만 원에 달해 미래가 조금 보이는 듯했다.
짱꼴라 감정하다 죽을 뻔
95년경부터 대구 우리나라에는 많은 수의 한국산으로 둔갑한 중국산 춘란이 판을 쳤다. 나의 고객들도 많이 당했다. 나는 애란 인들이 속아서 배신감으로 난계를 떠나는 걸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나는 짱꼴라 감정 업무를 했다. 많은 수의 춘란을 감정해 주었고 다수는 제자리로 보냈다. 그런 후 나는 협박을 받았다.
보증금도 못 받고 쫓겨 남
나는 이전 한 후 나름의 공부를 꾸준히 했으며 경북도립 구미도서관에서 2000.11.02-12.28일 (17회 34시간) 간에 걸쳐 처음 시작한 강의는 난생처음 해보는 강의치고는 잘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난을 배우려는 사람들을 위해 교육 서비스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하게 되었고, 나는 난 아카데미를 열었다. 이렇게 시작한 난초 강의는 조금씩 알려졌고 나는 난초 공부와 강의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왼 말 2001년 가을 아파트가 들어오게 되어 나는 쫓겨났고 제때 이사를 하지 못했다고 보증금도 받지 못했다. 가족들과 나는 몇 천만 원 치의 난초와 함께 길바닥으로 쫓겨났다. 또다시 거지가 되어버렸다.
수성구 이전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고객들에게 좀 도와 달라고 구걸하며 다녔다. 그때 한 분의 독지가가 제안해 왔다. 네가 나에게 1가지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도와줄 수도 있다. 그리고 테스트에 통과한다 해도 3가지 약속을 지키겠다고 굳게 약속하면 너를 도와주마! 하셨다. 또한, 약속대로 충실히 이행 했음에도 어려우면 안 갚아도 된다. 너의 최고 기술을 나에게 시연해 나를 감동하게 보일 수 있겠느냐?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나는 그에게서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세 가지 약속을 이행하라며 부탁을 해왔다.
첫 번째 평생 속이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두 번째 대학엘 가서 한국형 재배법 매뉴얼을 체계적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
세 번째 너의 기술을 세상에다 나누어 줄 수 있겠느냐?
나는 모두 예라고 답했고 그는 선 듯 큰돈을 내밀었다. 이 돈으로 2002년 5월경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881-1번지로 이전할 수 있게 되었고 월 10만 원짜리의 단칸방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대학진학
2000년 난초 교육을 위한 유료 아카데미를 개시하였고, 2001년 인터넷 사이트를 열었는데 이름이 난 아카데미였다. 2002년 5월 수성구로 이전해 차린 난원에서 나는 사이트를 알리려 1000분가량의 난초를 무료로 분양했으며, 신문고와 난 닥터를 개설해 조금씩 전진해 나갔다. 수성구 이전에 큰 도움을 주었던 독지가와 나의 스승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03년 농대를 진학하였고, 나는 이것저것을 익히고 배우며 2007년 영광스런 농학사를 수여 받았다.
석사 학위
2007년 학사를 마치고 나니 공부에 욕심이 생겼다. 특히 조직배양에 관한 궁금증이 깊어져 대학원을 진학했다. 한국 춘란을 전 방위적으로 이해하려면 조직배양은 필수적으로 공부해야만 한다. 나는 2009년 조직 배양으로 석사를 마치고 나는 그만 고혈압에 걸려 버렸다. 당시 공부 하느라 사업이 어려워져 아내는 일당벌이하며 나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나는 석사연구가 막바지일 때 박사진학을 결심했다. 지도교수님께서 좀 쉬운 걸 하라고 하셨지만 한.중간 특성 분석으로 고집했다. 이유는 중국춘란으로 유린당해 구겨진 한국 난계의 채면을 살리고 싶었던 나의 오랜 꿈인 짱꼴라를 판별 방법을 꼭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망 판정과 재활
공부마저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석사 논문을 쓴 후 무리를 했던지 나는 쓰러져 버렸고 경북대 의료원 응급실에서 폐가 멈춰져 사망에 달하게 되었다. 병명은 길랑-바래증후군!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나 각종 기계에 의해 집중 응급중환자 병석에서 45일간 식물인간처럼 지내야 했다. 아내와 가족들은 등창과 욕창을 방지하느라 온종일 나를 뒤집고 또 뒤집었다. 또한, 기도 삽관의 끝이 2번씩이나 막혀 버려 나는 이승과 저승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주치의는 평생 타고 다닐 전동 휠 처를 알아보라고 했지만 나는 꼭 이루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짱꼴라로 유린된 난계를 살리고 싶었고, 그간 연구해온 한국형 신 재배법을 완성시키고 싶었으며, 첨단 생산 설비인 벤로형 전자동 유리온실과 한국춘란 연구소의 꿈을 이루기 위해, 눈물겨운 재활을 해나갔다. 하느님도 감동하셨는지 차도가 매우 좋아져 휠 처가 아닌 목발을 딛고 쩔뚝이며 병원을 나서게 되었다.
난 연구소 설립과 박사 도전
나는 쩔룩거리는 몸으로 2009월 초여름 퇴원과 동시에 총비용 9억이 소요되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해 가을 완공이 되었고 한국에서 가장 근사한 이대발 난 연구소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나는 좀 쉬라는 지도교수님의 말씀도 거스른 체 몸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절필하면 끝이다 는 일념으로 석사 때부터 진행해온 박사과정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나의 오랜 꿈 짱꼴라 판별법을 위해 중국 정주 공항으로 갔다. 2010년 봄 춘절 시즌이라 항공편을 구하느라 혼이 났다. 중국 연구는 8명을 팀으로써 낮에는 산에서 밤에는 숙소에서 조사하고 또 조사했다. 국내 조사는 서해 최북단에서 동해의 고성 까지 한국의 23개 시군을 조사해, 논문을 써 발표를 하고 나니 기쁨은 잠시 그만 당뇨병에 걸리고 말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다고 했든가? 건강과 바꾸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동료 연구자 중 화훼연구소에서 양란을 연구하는 빈철구 박사는 요즘도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박사는 한국 춘란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무슨 한이 그렇게 서려 있을까? 이렇게 나는 대구가톨릭대학에서 업계 최초의 한국춘란 박사가 되었다.
후원회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나는 과도한 부채(금융 6억+사채 2억)의 영향과 급격한 난 값 하락으로 직원들도 하나씩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자도 못 갚은 지경인지라 회사를 살릴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치달아 버렸다. 2010-2011년 당시 난 값 마저도 급락해 온 난계가 암울한 시점. 나는 전국 강연을 다니며 재기할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2011년 가을 거제도에서 강의하고 뒤풀이 자리에서 나는 회사를 정리하고 싶다고 심경을 밝혔더니, 전국의 메아리가 되어 여러 회원님들에 의해 후원회가 만들어져 많은 금액의 기부가 이어졌고 나와 아내는 다시 심기일전해 회사(이대발 난연구소)를 지켜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명장
나는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였고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을지 고민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난계 저변 확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바로 이분들과 난계를 위한 큰일이라 여기고, 저변 확대가 되려면 난계 밖에 있는 대다수 국민에게 어필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유명 인사가 되어야 언론을 통해 홍보 효과 과 있을 것으로 판단했고 나는 대한민국농업명장에 도전하게 되었다. 2011.11월 부터 나는 대한민국명장 시험 준비를 했으며 거의 날 밤을 새우며 6개월간 열심히 준비하였다. 2012.9월 나는 대한민국명장 535호로 합격하였다. 한국 최초의 농업 명장이란 수식을 한 몸에 받으며 270만 농업인의 최고 영광인 대한민국초대농업명장이 되었다.
국민 스타
나는 명장이 된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간 평생 저변 확대한 효과보다 명장 이 된 후 1년이 더 많이 홍보된 듯싶었다. 여러 매체나 방송 등을 통해 소개되었고 한국 춘란을 정부와 농림부도 조금씩 인식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특히 고부가 종목인 한국 춘란의 관심은 기대 이상이었다. 나는 저변 확대를 위한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그래서 나는 명장보다 더 유명한 것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침 그때 명장 홍보대사를 뽑는데 명장 중의 명장이며 이름하여 “국민 스타 명장(2013년 성공 스토리가 있는 우수숙련기술인 국민 스타)”을 뽑는다는 공고가 났다. 나는 도전장을 냈고 2013.국민 스타 명장이 될 수 있었다. 나는 1년의 임기 동안 계속해서 방송과 대국민 강연 등을 다니게 되었고, CF도 한편 찍어 전국적으로 5000여 회나 송출이 되었다. 국민 스타 명장을 마치고 나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농림축산식품과학기술대상
2014년 나는 제17회 농림축산식품과학기술대상에 출전해 한국 춘란(Cymbidium-goeringii)의 키메라 돌연변이에 따른 아조변이 선발을 통한 고부가 신품종 육종법으로 농림부장관상을 받게 되었다. 나의 작은 연구열정으로 개발된 여러 기술 중 가장 대표적인 기술이 바로 이 방법이다. 본 기술로 인해 한국 춘란의 기술세계가 알려졌고, 여기저기에서 제대로 배우려고 많은 문의가 들어왔다. 나는 한국형 재배법을 완성해 전국에 교육하고 있다. 기술 개발은 국가의 미래와 직결된다. 나의 교육을 받은 분들의 후기를 보면 참 보람되고 스스로 가슴 뿌듯하기도 하다.
마지막 꿈 - 저변 확대의 꿈을 향하여
저변확대 만이 우리 난계의 살길이다. 나는 저변 확대를 위해 수많은 대학의 강의, 농업 연구소 강의, 전문가 강의, 실버 도시농업 강의를 해오고 있다. 한국 춘란의 저변확대에서 공로자라고 난을 연구하는 친분 있는 연구자들은 얘기한다. 나는 저변 확대를 위해 30개월간 매월 1촉씩 사서 70개월째 일부 판매를 해 본전과 이자를 환수한 후 남은 난으로 평생 수입을 발생시킬 수 있는 매뉴얼을 개발 했다. 이를 적극적으로 잘 활용하면 1000만 실버를 앞둔 우리나라의 실정에 약이 될 수 있다. 이제 도시농업은 시대적 운명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 과정을 개발해 시행하고 있다. 더하여 창업 과정과 전문가 과정과 PRO 작가반도 개발해 좋은 호응을 받고 있다. 이글을 읽는 분 중 기회가 되면 이대발 난 아카데미 강좌를 받아 보시길 권한다.
끝으로 2002년 흰색 병원 가운을 입고 난실에서 난초를 손질하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제가 난초를 연구하면서 가장 보람될 때가, 어려운 수술을 마치고 예후가 좋아 생명을 건졌을 때와, 저의 레슨을 통해 엄청난 변화를 체험한 교육생들이 스승의 날에 양말이라도 보내 줄때와, 유전자 감별을 통해 결과를 줄 때 감사의 메시지를 받을 때 한사람의 학자로써, 한사람의 난계 프로로써, 한사람의 동반자로써, 무한한 보람을 느낍니다.
만 48세인 제가 무슨 힘이 잇겠습니까만! 2016년 새롭게 단장하는 홈페이지를 통해 저는 춘란계 미래 100년을 위해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후계한국춘란 영농인 육성발굴과 도시농업의 전령사로서 또한, 저희 회사와 저는 100만 도시농업형 춘란 농가를 육성하고, 해외 수출 길 개척과 선물용 내수시장을 개척해 미래 100년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그간 많이 부족하였고 의욕만 앞선 철부지인 저희 관유정을 깊은 신뢰로써 화답해주신 펜들과 사랑하는 고객(회원)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15. 12. 30. 대발 이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