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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을 맞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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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난아카데미 작성일19-03-04 09:29 조회3,4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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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을 맞이해 내 고향 대구에서는 25년 전경 중국에서 산채한 무향춘란의 무차별 공습에 박살나버렸다. 마치 일본 치하에 놓인 과거 1900~1945년을 보는듯 무참히 짓밟히고 유린당했다. 그리고 그 피해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런데 더 슬픈건 나 외엔 아무도 이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사가 돈만 벌면되지 니가 무슨 포청천이라도 되는줄 아느냐! 돈 못 벌면 없던 흉이 생기고, 돈을 벌면 있던 흉도 없어지는게 이치다, 라고 나에게 충고하던 난계 선배의 말이 아직도 내 마음을 쓰리게 한다. 각설하고 당시 지배력을 행사 하던 인사들 중 더러는 나이어린 나의 눈에 는 이 아비규환을 즐기는듯 보였다. 그들은 남의 일이랍시고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은 실력이 있어서 속지 않을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도 일반 짱꼴라 보다 더 정교한 수에 상당수 더 큰 통증을 맛보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내 나이 28 그 시절을 회고해 보면 나는 최선을 다해 막아보려고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이는 대구와 하늘이 다 아는 일 이다. 나로 인해 성과가 얼마이든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 나로 인해 아예 작정을 하고 짱꼴라를 유통하던 서느곳은 문을 닫고 전업을 하였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는 당시 어린 나이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감당하기에는 무섭고 힘든 길이었지만, 초심자들을 절단 내는걸 두고 볼수 많은 없었다. 난계를 지켜내서 나의 노후와 우리나라 난계의 미래 보존 이라는 대의와 명분 하나로 달려왔다. 그간 살해 위협도 실제 받았다. 테러도 받았다. 난계 살려보자는데 그들은 적어도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것 같았다. 두 세곳의 모 난원이 개업 하는 날 짱꼴라 취급하지 말고 사업해 대구난계 살려보자고 호소한 기억이 난다. 한 곳은 또라이 취급을 받으며 문전박대를 당했고, 또 한곳은 찿아가 간판에 한국춘란 전문점을 지우고 중국으로 고쳐 달아라 라고 고함을 지른적도 있었다. 얼마 못가 그들도 문을 닫았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황펴한 폐허와 씻을수 없는 상처만 남겼다.... 당시 나는 선배들에게 맑은 물엔 큰 고기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것도 귀에 못이 밖일 정도로..... 나는 100kg짜리 큰 고기 1마리 보다 100g짜리 치어 1000마리가 난계를 살리는데 더 큰 역활을 한다고 믿기에 나는 늘 이런 식이다. 나는 당시 원산지 바로하기 운동본부라는 그린피스와 같은 애호가 활동 단체를 결성해, 감정업무와 감시업무를 해 많은 분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2000년 경 저희 회사 홈페이지에 난 농장 세계 최초 신문고라는 소통방을 만들어 고통받는 이들의 울분을 함께 했다. 25년 전 당시 나의 주변은 나의 안목으로 보기에는 많거나 작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짱꼴라를 슬쩍 또는 대 놓고 취급하는 이들이 많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상당수는 기술력 부족에 의해, 그들도 속아서 모르고 취급을 했는가 하면, 더러는 알면서도 슬 쩍 취급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 시절 3~4곳의 협력 업체가 있었는데 그 중 두곳도 중국춘란의 유혹에 넘어가, 문을 닫게되는 불운을 맞이하게되었다. 당시 대구에는 아예 대 놓고 직접 수입해 판매하는 업체도 있었는데 이들도 역시나 문을 닫았다. 외 이분들이 문을 닫았을까? 고객의 감소와 반품과 분쟁에 의해서 일것이다. 상식적으로 정상적 한국산이라 하여도 정품과 미래가치 발생 정도를 놓고 변별하고, 발전이 잘 되는 유전적 소인을 주야로 공부해, 고객의 호응을 이끌어 내고 10년 후 고수가 되고 또 유능한 전문가가 되어 처음에는 배가 고파도, 10년 뒤 성공을 바라보며 공부하고 내공을 길러야 할 시간에, 내일 일을 예측 못하고 건당 높은 마진에 도취되어, 살다가 보니 기술은 없고 상술만 늘어서 일것이라 짐작해본다. 또한, 대부분 신규애란인이 가격 적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데, 짱꼴라의 유통경로 상 또 생육 특성 상 한국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고, 또 저 경력자분들의 재배 기술 부족에 따라 대부분 죽이거나 생육이 부진해 초래된 당연한 결과였다고 본다. 특히 어쩌다 살아난 품종들은 개화시 봉심이 벌어지고 설판에 설점은 없고 짬뽕 국물을 뒤집어 쓴것 같은 등의 확연한 이질감에 질색을 하는 지경이었다. 그 시절 인근 모 난원은 그 곳에 판매코자 하는 난의 99%가 짱꼴라였는데, 나는 그곳을 찿아가 속이지 말고 물건 구해온 곳에 돌려주고, 한국산 난으로 판매를 하자고 몇 번을 찿아가 설득하기도 하였는데, 결국은 정도 보다는 이윤을 추구하다가 문을 닫았다. 나는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줄이고자 짱꼴라 감정소를 차려, 감정도 많이 했었는데 나는 협박도 많이 받았다. 당시 중국산은 국산에 비해 모양세도 달랐고 가격도 50%수준 이었다. 또한 지금에 들어서 천문학적 가격이라고 하는 산채된 일경구화(Cymbidium faberi) 단엽성들도 한국춘란이라고 속여서 판매할 지경이었다. 당시 난계의 환경은 초보자들이 상당히 늘어나는 추세였고, IMF까지 물려 수많은 실직자들 까지 합세해 난계는 100년 200년동안 난 인구가 늘어날듯 싶었다. 그런데 그때 중국춘란이 무척 싼 값에 등장해 암울한 시대적 상처를 난을 통해 치유하고자 참여했던 초보들은 짱꼴라를 변별할 기술이 없어서 무차별 유린을 당했다. 이들의 아쁜과거와 상처는 누가 책임져야 할까? 또 그런 일들로 인해 저변 확대가 안되어 발생한 피해는 누가 책임져야 하나? 슬프다 못해 가슴 쓰린다. 당시 나의 기억엔 짱꼴라에 의해 난을 그만 둔 애호가가 대구와 주변에 만도 수백은 될듯 싶었다. 이들이 정상적인 코스로 길을 걸을 수 있었다면 당시 시대적 상처치유에 큰 도움이 되었을것이고, 또 이 행복바이러스가 대물림되어 우리는 지금의 인구절벽 위기는 최소한 면할수 있을을것이고, 체계적 교육시스탬이 생겨나 리스크 0%의 초보 시절을 보내서 수십만으로 취미 인구가 늘어났을것으로 확신한다. 나는 학위논문이 짱꼴라 판별법이다. 지도교수님 왈^^ 네가 얼마나 한이 들었으면 평생에 한번 하는 연구를 중국산에 까지 들어가, 짱꼴라 비교분석을 하려느냐! 라 하였다. 우리 난계는 문제점 종합 병원이다. 이대로는 미래가 불 투명하다. 난계의 주인공은 나와같은 영농인이 아니고 취미인이 주인이다. 삼일절 만세운동은 친일이나 일 삶던 지주나 지배 계층의 봉기가 아니다. 민중의 봉기이다. 민중이 누구인가 국가의 주인(도산 안창호) 이다. 난계에서는 값비싼 난으로 부를 축척하려는 나(이대발)같은 자들이 이니고, 난을 통해 문화 활동을 즐기고 작품기술을 배우려 노력하는 애호가 쥐미인이 바로 주인이다. 이점이 부디 인식되서 주길 바란다. 우리난계는 주인이 주인인 줄 모르고, 이렇다보니 나 같은 심부럼꾼이 난계의 주인인 것 처름 인식 될때가 더러 있는것 같다. 언제쯤 주인이 주권을 인식할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즉 국가는 국민이고 국민은 국가이다 나는 그들을 모시는 심부럼꾼일뿐이다. 나는 나의 주인인 나의 난을 사주어 처자식을 굶지않게 해주는 고마운 애호가 취미인 작가분들의 즐거운 여가를 돕고 알선이나 하는 브로커일뿡이다. 나는 이런 내가 선택한 직업에 최선을 다한다. 또한, 심부름을 더 잘하려고 공부하고 도전하고 교육사업도 하는것이다. 주인분들에게 인정받으려고...... 경쟁자 심부름꾼들 보다 더 인정받으려고 유전자 감식법을 발명하였고, 짱꼴라 연구를 하였고. 재배생리 유전육종 조직배양등을 주경야독을 통해 좀더 했을뿐이다. 나는 난을 길러 촉이나 분주해 판매하는 농업인인지라 그들의 조력자 이다. 주인(애호가 취미인)이 주인 의식을 버리면 다 끝이다. 나같은 농장주도 나의 생산품을 사서 마진을 붙이는 유통인도, 나에게 납품하는 신채인도 모두 game over 가 된다. *한국춘란은 심비디움 괴링기 1종이 서식하고 중국춘란은 괴링기(속칭. 무향 중국춘란)와 포레스티(속칭. 유향 중국춘란) 2종이 서식한다. 그리고 이들간의 잡종도 많다. *짱꼴라는 한국산으로 속여서 판매할 요량이면 "짱꼴라" 중국산으로 판매할 요량이면 중국춘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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