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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보 - 주간조선 “지독한 놈” 스승도 두 손 든 춘란 집념 ‘농업’ 직종 1호 춘란 명장 이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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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1-03 11:52 조회2,6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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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보 - 주간조선 “지독한 놈” 스승도 두 손 든 춘란 집념 ‘농업’ 직종 1호 춘란 명장 이대건
 

‘2012 대한민국 명장’ 27명의 명단이 지난 8월 27일 나왔다. 고용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이 기계·재료·항공·섬유·농림·해양·산업응용·공예·서비스 등 9개 분야에서 선정한 명장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15년 이상 한 길을 걸어온 대한민국 최고의 숙련기술인들. 허황된 한탕주의가 판치는 요즘, 땀의 가치를 온몸으로 구현한 의지의 한국인들이다. 제도권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명장의 스토리는 진정한 배움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도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27명의 명장 중 5인을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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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소년은 또래에 비해 왜소했다. 친구들한테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농업고교에 진학하면서 원예과를 선택한 것도 그나마 작은 몸집으로 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고교 졸업 후 군대에 가서 운 좋게 원예병이 됐다. 사령관 숙소의 온실에 있는 분재와 난초를 안 죽이는 것이 임무였다. 난을 만지는 것이 남달랐던지 공관장이 “제대하면 난 사업을 해봐라”고 권했다. 제대하자마자 16~19㎡(5~6평) 되는 작은 가게를 얻어 난 사업을 시작했다. 춘란 명장 이대건(45)의 출발이었다.
   
   지난 9월 3일 산업인력공단에서 선정한 2012 대한민국 명장이 된 이대건씨는 농업 명장 1호이다. 지금까지 ‘종자’로 2명의 명장이 나왔지만 올해 ‘농업’ 직종을 신설하고 그 안에 농업 관련 직종을 통합했다. 지난 9월 3일 명장 수여식이 있은 다음날 대구 수성구 지산동에서 난 아카데미 ‘관유정’을 운영하는 이대건씨를 만났다. 관유정 앞에는 명장 선정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660여㎡(200여평)의 유리 온실에는 1000여개의 난 화분이 명장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 찾아 6개월
   
   명장이 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험난했다. 제대 후 멋모르고 시작한 첫 사업은 참패였다. 물만 잘 주면 되는 사령관의 온실이 아니었다. 난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그에 비해 무림의 고수들은 너무 많았다. “무조건 팔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일본 흥아원이나 수락원처럼 몇 대가 이어져오는 곳을 보니 제대로 기술을 연마하지 않으면 안되겠더라고요.”
   
   그는 포기하는 대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대구에서 찾아 보니 당시 양대 산맥이 있었다. “한 분을 찾아가서 월급은 필요 없으니 일만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안 받아주셨어요. 다른 한 분은 영남 난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정정은 선생님이셨어요. 또 거절당하면 길이 없겠다 싶어 선생님에 대해 분석을 했어요.”
   
   그는 선생이 자주 다니는 볼링장에 취직을 했다. 새치기도 시켜주고 VIP로 모시면서 안면을 텄다. 6개월 동안 마음을 얻은 후 하루는 난초 책을 몽땅 들고 갔다. 선생과 부딪힌 척하면서 일부러 책을 떨어뜨렸다. 선생이 “자네가 웬 난초책을 가지고 있느냐”면서 놀랐다. 그렇게 첫 번째 스승을 만났다. 배움의 길은 쉽지 않았다. 기술은커녕 몇 달간 화분에 들어가는 돌만 씻었다. 손도 시리고 기술은 언제 배우나 싶은 마음에 막대기로 돌을 휘휘 젓고 있었다. 그 꼴을 본 스승이 “그렇게 할 거면 집에 가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돌이 절반 크기로 닳을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 알고 보니 돌 세척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돌이 뾰족하면 뿌리를 다치게 해서 병이 들게 하는 원인이 됐다. 그때의 경험으로 그는 나중에 연구자료를 내기도 했다.
   
   그러기를 6개월, 스승의 난원에서 고객이 맡겨놓은 700여만원짜리 난을 도둑 맞았다. 난 주인이 그를 범인으로 몰아 스승에게 그를 쫓아낼 것을 요구했다. 다방에 앉아 사정을 이야기하는 스승 앞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면서 생각했다. “직원이 아니면 손님으로 가면 되지!”
   
   
   “원산지 속이지 맙시다”
   
   다음날부터 손님 자격으로 30분 더 일찍 가서 스승을 기다렸다. 보름이 지나자 스승이 “지독하다”면서 “난값은 물어줬으니 다시 나와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스승은 ‘지독한’ 제자에게 아낌없이 기술을 전수해 주면서 “내가 한국 1인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너라면 가능하겠다”고 말했다. 신혼여행 안 가고 결혼식 비용 아낀 돈 들고 독립하는 제자에게 스승은 기자재며 창업자금을 대주고 “스승과 제자가 경쟁하면 모양이 좋지 않다”면서 사업을 접었다.
   
   7㎡(약 2평) 남짓한 차고에서 시작한 사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옆집에 새로 문을 여는 화장품 가게에서 래커 냄새가 흘러들어와 난이 다 죽기도 하고, 돈 아끼겠다고 직접 지은 비닐하우스가 바람에 날아가는가 하면, 어렵게 자리 잡은 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쥐꼬리 보상금 받고 쫓겨나기도 했다.
   
   결정적 위기는 중국발(發) 원산지 둔갑. 1995년부터 값싼 중국산 춘란이 대거 들어와 한국산으로 둔갑하면서 정품을 파는 곳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는 가게마다 돌아다니면서 “원산지 속이지 말자”면서 1인 시위를 하고 다녔다. 욕만 실컷 얻어먹고 중국산을 감정한 소견서를 써줬다가 위협을 받기도 했다. 포기의 순간 기회가 왔다. 그의 가능성에 투자한 난 애호가가 나타났다. “안 갚아도 좋으니 꿈을 펼쳐보라”면서 억대의 돈을 내놓고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한국 난계에 정설도 정론도 없다. 네가 체계화를 시켜라”면서 대학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난의 99%는 춘란으로 한·중·일이 주산지이다. 중국의 난 역사는 2000여년, 일본은 500여년. 한국은 고작 50여년이라고 한다. 조선 세조 때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이 전해지긴 하지만 맥이 끊겼다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가지고 들어오면서 살아났다. 그러다 보니 난에 대한 지식은 중국과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박사의 꿈을 이루다
   
   대학 진학은 자신의 꿈이기도 했다. 대구 가톨릭대를 들어가서 석사에 이어 박사과정까지 끝장을 봤다. 그동안 논문을 쓰고 난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그는 수많은 연구 자료를 쏟아냈다. 대표적인 것이 DNA로 중국산을 판별하는 SSR 분석법이다. 샘플 채취를 위해 중국 산골에 잠입해 목숨 걸고 난을 캐오고 제주도부터 울릉도까지 전국을 돌며 채취한 국산과 비교해 데이터를 뽑아내고 표준을 만들었다. 그는 “승진 축하용 등 선물용으로 팔리는 중국산 난 수입이 연 500억원 규모이다. 중국산 대신 국산을 사용하면 외화 낭비를 줄일 수 있고 난 산업도 살릴 수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신품종 개발도 나섰다. 저작권과 같은 ‘이대건’ 신품종은 39개. 대만이 ‘호접란’을 세계 1위로 키워냈듯이 우수 품종을 만들어서 한국 춘란을 국제화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그동안 그가 이룬 성과는 셀 수 없이 많다. 신지식인에 선정되고 국제 난 대회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명장 신청을 위해 제출한 서류를 보니 연구성과·표창장 등을 모은 자료가 300쪽 분량이었다. 그는 온라인 ‘관유정’ 사이트를 통해 그의 자료를 모두 공개하고 난 아카데미를 통해 전문가 교육을 시키고 있다. 그가 난초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난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이라고 했다. “무사고를 위해 도로교통법이 필요하듯 건강한 난 업계를 위해 질서를 만들고 매뉴얼을 만들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농업을 위한다면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처방을 제시해야 합니다.”
   
   
   “신용은 만드는 것이다”
   
   1년 전에도 위기가 왔다. 불황을 버티기가 힘든 데다 부인이 암 진단을 받았다. 처자식 돌볼 틈도 없이 달려왔다 싶었다.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는 아내에게 ‘비행기 태워주겠다’는 약속도 아직 못 지켰다. 누굴 위해 살았나 후회스러웠다. 사이트에 ‘난을 그만두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그의 사이트 회원은 2600여명. 회원들이 난리가 났다. “성금을 모으자” “난을 사주자”면서 ‘이대건 후원회’가 결성됐다. 5000원도 내놓고 100만원을 쾌척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 덕에 마음을 다잡았다. 후원회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명장 신청은 그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했다.
   
   난 키우기가 어렵지 않느냐는 말에 “난처럼 자생력이 강한 식물도 드물다”며 전해준 명장의 노하우. 물 많이 주고(여름엔 매일) 겨울에 7도 이상 유지해주고 최소한 1년마다 분갈이 할 것. 건강한 난을 구입하기 위한 팁은 살 때 화분을 엎어서 뿌리에 병이 없는지 그 자리에서 확인하라는 것이다. 만일 화분을 못 엎게 하는 가게라면 구입을 고려해봐야 한다. 그는 판매할 때 뿌리 확인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려다 그의 사무실 벽에 걸린 액자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신용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endmark.gif
 



[이 게시물은 난아카데미님에 의해 2017-01-29 13:12:15 포토갤러리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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