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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1-03 13:49 조회2,584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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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농업명장, 난 전문가 이대건>
“100년의 역사를 가진 74개 농업계 고등학교와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으로 그리고 그들이 진로를 정하는데 롤 모델이 되고자 합니다.”
어려서부터 초록색을 너무 좋아해 ‘초록이’로 불렸던 이대건(47세)씨. 중학교 2학년 처음 접한 ‘농업’ 교과서 속 무궁무진한 정보들은 그를 설레게 했다. 다른 과목과는 달리 농림, 축산, 원예 시험에서는 언제나 고득점이었다. 이런 그의 재능을 눈 여겨 본 농업 선생님이 그에게 대구농림고 진학을 권했다. 미래에는 농업인이 조금만 연구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업계나 인문계고를 가길 바랐던 부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대구농림고 진학을 결심하고 그 중에서도 원예로 전공을 정했다.
버스로 1시간 10분을 달려야 하는 머나먼 통학길도 그에게는 늘 소풍가는 것처럼 즐거웠다. 재미가 있다보니 학교생활은 만족스러웠다. 교장선생님도 그를 특별히 귀여워할 정도였다.
재학 중 ‘우수농고생’으로 뽑혀 100만원의 정부지원금을 받아 흑염소를 7마리 키웠다. 고3때는 흑염소 대신 한우를 키웠다. 3학년 때 원예종묘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농업인의 길을 가려는데 체구가 너무 왜소했다. 축산과 선생님의 권유로 학교장 추천을 받아 한국마사회에 들어가 근무를 하다가 징병검사 차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1988년 방위병으로 입대, 2군사령부 수목관리병으로 복무하던 중 사령관숙소 공관장이 그를 관사 원예병으로 스카우트했다. 공관장이 ‘유리온실에 있는 난을 죽이면 영창을 보낸다’고 겁을 주기에 난 잡지를 보며 원예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공관장은 ‘이상병이 난을 관리하면 이상하게도 죽어가는 난도 다시 살아난다’며 ‘제대 후에는 난을 업으로 삼아라’고 권유할 정도였다.
24살, 가지고 있던 돈과 부모님께 빌린 돈 100만원으로 조그만 난 가게를 차렸지만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연명하는 수준으로 이어가던 어느 날 고객 중 한 명이 난을 그렇게 몰라 어떻게 하냐며 좀 제대로 알고 하라는 것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그날 이후 가게를 접고 도서관, 헌책방 등지를 다니면서 난과 관련된 책이란 책은 모두 섭렵했다.
책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흥화원이나 수락원처럼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선진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학을 결심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국내 최고의 스승을 찾아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 최고의 대가로 알려진 정정은 선생과 인연이 돼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하지만 처음, 스승님은 제대로 된 기술은 가르쳐주지 않고 난석만 씻도록 했다. 하지만 차츰 스승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난초의 가치를 감별하고 키우는 법을 배웠다. 고객관리도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덜컥 사고가 났다. 한 단골이 맡긴 700만원짜리 난을 분실하고 말았던 것. 고객은 그를 범인으로 몰았고 그는 결국 난가게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억울했지만 개의치 않고 손님자격으로 계속해 출근했다. 스승은 그를 본체만체했지만 보름이 지나자 “너 같이 지독한 녀석은 처음 본다”며 “난 값은 물어줬으니 다시 나와라”고 말했다. 그 때부터 스승은 본격적으로 그에게 최고의 기술들을 전수했다. 어느 날, 스승은 그에게 ‘최고의 난 전문가’가 될 것을 주문하면서 창업자금까지 무료로 대주며 그에게 ‘하산’을 허했다.
1995년 2평 남짓한 주택가 차고에서 다시 난가게를 창업했다. 다행히 사업이 잘 돼 가게를 확장•개소했다. 헌데 이번에는 옆 신축건물에서 시너 냄새가 흘러 들어와 난이 죽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값싼 중국산 춘란이 대량으로 수입돼 원산지가 국산으로 바뀌는 등 고난의 행군이 계속됐다.
정직하게 우리 것만 고집하던 그는 난 가게를 찾아다니며 ‘속이지 말자. 함께 다 죽는다’며 1인 시위를 하며 중국산 감별법을 가르쳐주다 위협까지 받았다.
2002년 자포자기하던 중 그의 난에 대한 열정과 기술에 감복한 한 난 애호가가 그에게 큰 금액을 투자했다. 그 난 애호가는 “돈은 갚지 않아도 되니 공부를 더해 한국형 매뉴얼을 만들어 당신이 가진 기술을 세상에 나누어 주라”고 당부했다.
이런 도움 덕분에 2000년대 중반 그의 난에 관한 지식과 기술은 당대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난의 저부가의 유전형에서 고부가의 유전형으로 발전시키는 방법의 일종인 ‘호에서 중투로 발전시키는 키메라 원리’를 국내 최초 개발해 기술을 공개함으로써 난 농가들에게 큰 인심까지 얻었다. 또 국내 · 국제 난 경연대회에서 수차례 입상했다. 2007년 아시아태평양 세계 난전시대회에서는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그해 임업분야 신지식인으로도 선정됐다.
이후 가게를 옮겨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난 아카데미를 열어 제자를 양성하고, 그가 닦은 기술을 공개했다. 스승님과 그를 도와준 난 애호가의 뜻에 따라 학업도 병행했다. 구미1대학 원예조경과를 마치고, 대구가톨릭대에 편입한 뒤 조직배양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대구가톨릭대에서 『춘란의 형태학적 특성 및 SSR DNA 좌위에 의한 다양성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 동양 난 농가에서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또 ‘춘란 품종에 대한 SSR DNA마커의 복합유전자형 결정과 운용’이라는 논문을 써 춘난으로는 난농가 처음 SCI-E 논문에 등재되기도 했다. 신품종개발에도 나섰다. 지금까지 39개의 ‘대발표’ 품종은 한국의 난 업계에서 전무후무하다.
그는 한국춘란에 최초로 33개의 춘란 꽃의 외부특성 차트를 고안해 내 표준화 작업을 완성했으며 난에 대한 30여개의 재배 기술 매뉴얼 및 공정 개발을 했다. 이대발 난 아카데미를 통해 12년째 한국형 신재배 기술을 전국 농가에 보급하고 있다.
인생의 고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학위논문을 쓰느라 애쓰다 죽음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폐에 물이 차 병원에서도 살 수 없다고 판정이 났지만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2011년에는 경기불황에다 부인이 암에 걸려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았다.
너무 힘들어 난 업계를 떠나고 싶다며 홈페이지에 심정을 토로했더니 후원회가 생겼다. ‘당신이 떠나면 우리 난계는 누굴 믿어야 하나’며 십시일반 후원금을 모아 다시 시작할 계기를 마련해줬다. 그는 농업(난) 명장이 되는 것으로 후원인들에게 보답했다.
그의 꿈은 한국 춘란을 세계화시키는 것이다. 농업은 석유자원보다 더 중요하다. 종자(seed)가 금(gold)보다 더 귀중하다는 그의 믿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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