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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공감 -우수품종 만들어 춘란의 국제화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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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1-03 11:50 조회2,5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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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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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건(45) 명장이 춘란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고교 졸업 후 입대한 군대에서였다. 또래에 비해 유난히 왜소했던 그는 농고에서 원예과를 선택했다. 그나마 작은 몸집으로 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농고 졸업장 덕분이었는지 입대 후 2군사령관 공관의 유리 온실 담당으로 배치받았다. 사령관의 춘란과 분재의 생사에 그의 군생활이 달려 있었다. 관련 책을 사서 공부하며 기초지식을 익히고 정성을 다했다. 그의 손길이 선임병과 달랐는지 공관장이 “제대하면 난 사업을 해 보라”고 권했다.

제대 후 5~6평 남짓한 가게를 얻어 난 사업을 시작했다. 난을 안 죽이고 열심히 팔면 되는 줄 알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일본에서 몇 대째 가업으로 내려오는 흥아원, 수락원 같은 곳을 보니 제대로 된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싶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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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대구에서 스승을 찾아나섰다. 당시 대구에는 난계의 양대산맥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을 찾아가 “월급은 필요없으니 일만 배울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남은 사람은 영남 난계의 1인자라고 평가받는 정정은 선생이었다. 섣불리 찾아갔다 또 거절당하면 안 되겠다 싶어 정정은 선생에 대해 분석을 했다. 볼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생이 잘 다니는 볼링장에 취직했다.

7선생이 오면 새치기도 시켜 주고 VIP로 모시면서 낯을 익혔다.

그렇게 6개월, 자신이 갖고 있던 난 관련 책을 몽땅 들고 가서 일부러 선생과 부딪쳤다. 책이 우르르 떨어지자 선생이 “자네가 웬 난초책을 가지고 있느냐”면서 깜짝 놀랐다.

6개월 공을 들인 덕에 제자가 됐지만 배움의 길은 쉽지 않았다.

기술은커녕 몇 달간 화분에 들어가는 돌만 씻었다. 손도 시리고 기술은 언제 배우나 싶은 마음에 막대기로 돌을 휘휘 젓고 있었다.

그 꼴을 본 스승이 “그렇게 할 거면 집에 가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돌이 반이나 닳을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 알고 보니 돌 세척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돌이 뾰족하면 뿌리에 상처가 나 결국 난이 병들게 된다.

그러기를 6개월, 스승의 난원에서 고객이 맡겨 놓은 7백여 만원 짜리 난이 도둑을 맞았다. 난 주인이 그를 범인으로 몰아 스승에게 그를 쫓아낼 것을 요구했다.

도둑으로 몰리면서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직원이 아니면 손님으로 가면 되지!” 직원일 때보다 30분 더 일찍 나가서 스승을 기다렸다. 보름이 지나자 스승도 그의 집념에 두 손을 들었다. “지독한 놈”이라면서 “난값은 물어줬으니 다시 나오라”고 말했다. 스승은 “국내 1인자가 되는 것이 내 꿈이었는데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겠다”면서 그때부터 아낌없이 기술을 전수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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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비행기 한번 태워주지 못하고 뛰었지만 사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옆집에 새로 문을 연 화장품 가게에서 냄새가 흘러들어와 난이 다 죽기도 하고, 돈 아끼겠다고 직접 지은 비닐하우스가 바람에 날아가는가 하면, 어렵게 자리 잡은 곳에 아파트가 새로 들어서는 바람에 쥐꼬리만 한 보상금을 받고 쫓겨나기도 했다.

결정적 위기는 중국발 원산지 둔갑이었다. 1995년부터 값싼 중국산 춘란이 대거 들어와 한국산으로 둔갑하면서 정품을 파는 곳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는 가게마다 돌아다니면서 “원산지 속이지 말자”면서 1인 시위를 하고 다녔다. 욕만 실컷 얻어먹고 중국산을 감정한 소견서를 써 줬다가 위협을 받기도 했다.

포기의 순간, 기회가 왔다. 그의 가능성에 투자하겠다는 애호가가 나타났다. “안 갚아도 좋으니 꿈을 펼쳐 보라”면서 억대의 돈을 내놓고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한국 난계에는 정설도, 정론도 없다. 네가 체계화를 시켜라”면서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할 것을 권했다.

대학 진학은 그의 꿈이기도 했다. 대구 가톨릭대에 들어가 쉬지않고 석사, 박사 학위까지 땄다. ‘제2의 은인’인 고재철 교수의 지도 아래 수많은 논문과 연구 자료를 만들어 냈다. 강의를 뛰고 사이트도 만들고, 난 아카데미를 만들었다. 사이트에 ‘신문고’ 코너를 만들어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그의 연구자료들을 전국의 난 애호가에게 제공하고 있다.

대표적인 연구물은 박사논문 주제로, DNA로 중국산을 판별하는 SSR 분석법이다. 샘플 채취를 위해 중국 산골에 잠입해, 목숨걸고 난을 캐오고 제주도부터 울릉도까지 전국을 돌며 채취한 국산과 비교해 데이터화하여 표준을 만들었다. 그는 “승진축하용 등 선물용으로 팔리는 중국산 난 수입시장 규모가 연간 5백억원이다.

중국산 대신 국산을 사용하면 외화낭비를 줄일 수 있고 난 산업도 살릴 수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신품종 개발에도 나섰다. 저작권과 같은 신품종 등록은 39개.

대만이 ‘호접란’을 세계 1위로 키워 냈듯이 우수품종을 만들어 한국춘란을 국제화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그동안 그가 이룬 성과는 셀수 없이 많다. 신지식인에 선정되고 국제난대회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명장 신청을 위해 제출한 서류를 보니 연구성과와 표창장 등을 모은 자료가 3백 페이지 분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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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그의 난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가 있었다. 불황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데다 부인이 암 진단을 받은 것. 처자식 돌볼 틈도 없이 정신없이 달려왔다 싶었다. 결혼 이후 지금껏 “비행기 태워 주겠다”

는 약속도 못 지켰다. 누굴 위해 살았나, 후회스러웠다. 사이트에 심경을 고백하고 “이제 그만두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사이트 회원은 2천6백여명. 회원들이 난리가 났다. “성금을 모으자” “난을 사주자” 면서 ‘이대건 후원회’가 결성됐다. 5천원도 내놓고 1백만원을 쾌척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 덕에 마음을 다잡았다. 후원회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명장 신청은 그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는 “이제 명장이 됐으니 한눈 팔 수도 없다”면서 “무사고를 위해 도로교통법을 만들 듯이, 건강한 난 업계 유지를 위해 질서를 만들고 매뉴얼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황은순 (주간조선 기자) / 사진·장은주 기자.

[이 게시물은 난아카데미님에 의해 2017-01-29 13:12:15 포토갤러리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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