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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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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저녁노을 작성일11-02-14 22:37 조회7,764회 댓글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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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내가 지닌 홍화가 대한민국 최고라 생각한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난과의 대면은 꼭 그래야 했다. 왜냐하면 최고의 난을 항상 꿈꾸어야 하니까. 나는 난 때문에 18년 동안 해왔던 일을 그만두고 시골에 내려와 산 속을 헤매고 있다. 난이란 단순한 식물이 아니고, 영물이기에 섣부르게 덤볐다가는 내가 떨어질 판이므로, 무릎이, 얼굴이, 종아리가 가시나무에 긁혀 피를 흘린다 해도, 핏빛 홍화를 찾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운명이란 전혀 생각지 않은, 우연한 시간에 찾아오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아 있다 생각했을 때, 난은 나를, 내 운명을, 후벼 팠다. 내가 돈이 있어서가 아니라, 난은 그것 이상의 가치를 말하는 지란의 향을 풍기므로, 거절할 수 없는 난의 유혹에 빠진들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하여, 난이란 살아생전 단순한 여기로써 취미가 아닌, 내 삶의 일부가 된다. 난이 아니었던들,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삶이란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여러 빛깔이 어울려 엮는 우주의 일부이기에, 곰팡이처럼 몸을 움츠리며 아름다운 삶의 의미를 새김질 해본다. 예(藝)가 있는 삶이란 난잎처럼 꽃잎처럼, 오랫동안 가마에 있는 도기처럼 햇볕에 장작불에 담금질해야 빛이 나고 윤이 나고 설령 무광이라도, 투박한 생명의 호흡이라도 남길 수 있으리라. 예(藝)가 있는 삶이란 난을 하나의 문화로써, 또 다른 가치를 파생하는 영혼의 숨소리인지도 모른다.

노을 진 홍화는 내게 그렇게 왔다. 먼 우주에서 오는 화음처럼, 별빛처럼 한겨울을 보낸 손님이 붉은 웃음을 햇살에 반짝이며, 비단결보다 고운 난잎의 발자국에, 내 귀를 열고, 내 눈을 뜨고, 잠들었던 영혼을 깨우며, 나를 불렀다. 그로부터 나는 난과 함께 꿀 수 있었으므로, 여한 없는 삶이 무엇인지 막연하게 짐작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부대낌 속에서 난은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견뎌야 하는 걸까?

영혼이 맑은 사람이 사람을 부르듯 내 홍화는 친구를 불러 대서, 이제 적잖은 길동무들이 생겨났다. 산반은 거친 사내의 호흡처럼 삶의 상처를 입었다. 복륜은 황색의 백색의 줄을 그어 꿈의 울타리를 엮었다. 중투는 행복한 미소를 다사롭게 녹을 감싸고 내면을 채워나갔다. 서반은 배 아래로 깊은 상처를 아로새기며 붉은 꽃이 웃을 때까지 기다림의 아픔을 감내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봄이 온다. 소나무의 향내에 기대어, 해토 무렵 대지가 풍기는 입김으로 난은 봄이 와야 하므로, 만물을 일깨우는 소임을 마다하지 않고, 당당하게, 꽃샘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기 있게, 꽃대를, 밀어, 올린다. 수도 없는 봄날이 오갔으나, 나는 봄이 주는 미덕을 알지 못하고, 겨우내 삶의 고통에 몸을 움츠렸었다. 난과 함께 봄을 맞으며 봄꿈을 꾼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한 줌 거름에 불과하다고 난이 내게 일러 주었으므로, 나와 더불어 피는 꽃이야말로 그 아름다움 살갗이야말로 그 무엇과 견줄 수 있으랴!

공자는 삼년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했지만, 공자도 70에 이르러서야 순리에 거스르지 않는 마음을 ‘종심(從心)’이라 하여 법도를 뛰어넘지 못한다 하였다. 흐르는 물을 보고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천상지탄, 川上之嘆) 자신을 다잡았던 선생의 삶은 지란의 향이 2500년을 넘어 풍겨오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는가? 하여 ‘군자’(君子)란 삶을, 당장의 배부름과 편안함과, 바꾸지 않는다. 날이 추워지고 나서야, 송백(松栢)이 시들지 않았다 하는 세한(歲寒)의 살이란, 사철 넉넉히 푸르른 소나무의 심성에 난의 푸르른 본성을 더하는 게 ‘송심난성(松心蘭性)’이 아닌가?

이제, 난과 연을 맺은 지 3년 나는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선생의 서두름을 택하여, 여러 난을 들였지만, 이제 한 걸음마 옮겼음에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난의 격(格)을 갖추고자 난잎을 떠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난잎과 꽃잎의 변화에 내 얼굴과 내 마음을 묻는다. 내 홍화가 피는 그 날까지.

댓글목록

김성수님의 댓글

김성수 작성일

깊이 있는 글맛에 참 감사하고 부러움을 느낍니다
부드러운듯 강렬한 느낌의 글을 대하고 보니
많이도 가슴이 설레이네요^^
항상 즐난하세요~

난조아님의 댓글

난조아 작성일

감명을 주는 잘 읽고 갑니다.

화우림님의 댓글

화우림 작성일

대단한 愛蘭人生 이십니다.....^^

난초보꾼님의 댓글

난초보꾼 작성일

꼭! 홍화가 피길 기원합니다...

입변사랑님의 댓글

입변사랑 작성일

홍화가 피는 그날까지 즐난하세요~

난생난사님의 댓글

난생난사 작성일

난의 매력을 듬뿍 담고 있는 글이네요...잘 읽고 감동하고 갑니다...즐난하세요.

청운님의 댓글

청운 작성일

꿈이 있으면 이루질것이라 생각합니다...

꿀벌님의 댓글

꿀벌 작성일

난과 함께 하는 운명적 삶 같은 ....

금강님의 댓글

금강 작성일

좋은글 잘보았읍니다

수리산님의 댓글

수리산 작성일

홍화의꿈 빨리오길 기원합니다

구름풍선님의 댓글

구름풍선 작성일

연한 파스텔화처럼 스며드는 글...잘 읽었습니다..

해용님의 댓글

해용 작성일

좋은종자 잘 보았습니다.

탱주님의 댓글

탱주 작성일

즐감입니다,

삐돌이님의 댓글

삐돌이 작성일

즐감하였습니다.

깜보님의 댓글

깜보 작성일

부럽습니다 과감하게 뛰어든점, 글솜씨또한대단한 어휘력, 부럽습니다. 자주글오려주시구요,감사합니다^&^

군자란님의 댓글

군자란 작성일

저녁노을님의 난초는 한결같이 에이스만 소장 하시는군요...

난이야님의 댓글

난이야 작성일

글 잘읽고 갑니다 세한도의 그림이 소나무이니 난과의 인연이 있습니다

일라니님의 댓글

일라니 작성일

3년이라면 그리 긴 세월은 아닙니다만 난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서 무언가 결실을 보겠다는 결의가 있으니 좋은 꽃으로 보답을 받을 수 있을리라 생각합니다.

러브장님의 댓글

러브장 작성일

즐감하고 즐독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