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초대 CEO 이병철 회장
제일제당(1953), 제일모직 (1954) , 동방생명(1957), 안국화재해상보험(1958), 세계백화점(1962), 삼성문화재단(1965), 전주제지(1965), 중앙개발(1966), 한국종합병원(1966) 중앙일보-동양방송(1966), 삼성전자(1969), 삼성전관(1970), 제일합섬(1972), 삼성전기(1973), 삼성코닝(1973), 호텔신라(1973), 삼성석유화학(1974), 삼성중공업(1974), 용인자연농원(1975), 삼성항공(1977), 삼성시계(1977), 삼성건설(1977), 한국엔지니어링(1978), 삼성반도체통신(1980)
그가 사업을 하기 위해 투자한 초기 자본은 쌀 300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50년 후 그가 이룩한 삼성그룹은 166개의 계열기업에 103 조 가량의 매출액(2001년도 8월 기준)을 기록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병철은 원래 부자였으니까 라고 하며 그의 놀라운 업적을 애써 무시하려 한다.
일본의 3 대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내셔널 그룹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자동차의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 소니의 창업주 이부카 마사루가 그들이다.
이 셋을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병철이라는 사람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기업가라고 말하고 싶다.
▶1981년 6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정주영 전경련 회장 등
재계인사들을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1 . 투기성 사업의 무용성
그는 26세에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쌀 300석 분의 토지로 도정업, 운송회사 , 토지 매입을 차례로 해나갔다. 여기서 도정업이라는 것은 벼를 사다가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드는 일을 말한다. 이 같은 사업을 하면서 이병철은 경남 일대에서 최대의 지주가 된다. 그러나 1937년 3월 터진 중일 전쟁으로 인해 일본 정부가 은행의 대출을 중단함에 따라 전답의 시세가 폭락, 은행 대출금에만 의존하던 이병철에게는 현금 2 만원과 전답 10만평만을 제외하고 모든게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때 말한 것이 ` 3利가 있으면 3害가 있다` 이다. `교만한 자 치고 망하지 않은 자 없다.`
그 당시 상황을 통해 얻은 경험을 통해
(1). 사업은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통찰해야 한다.
(2).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3).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4). 직관력의 연마를 중시하는 한편 제 2 , 제 3 의 대비책을 강구해야한다.
(5).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는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
2. 최고라는 것은 무엇일까?
최고라는 것은 삼성의 모토이기도 하다.
최고만이 살아남습니다. 최고가 되는 길! 삼성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입니다.
모든 기업이 최고가 되기를 원하지만, 삼성은 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기업이기도 하다. 그런 최고라는 개념을 심어준 인물이 바로 이병철이다. 이병철에게 최고라는 의미는 최고의 품질, 최고의 인재를 의미한다. 일종의 장인정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 이병철이 꿈꾸는 것이다. 평소에 이병철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노력하는 유전자는 따로 있다.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다 노력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볼 때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노력은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 품질로서의 최고
이병철에게 최고라는 개념이 잡힌 것은 1950년 2월 도쿄를 방문했을 때 라고 한다. 뒷 길에 허름한 이발소에 별생각없이 들어가서 주인에게 말했다.
`이발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제가 3대 째니까, 가업이 된지 이럭저럭 60년쯤 되나 봅니다. 자식 놈도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만...`
이병철은 사소한 대화에서 일본인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을 느꼈다. 삼성의 기업정신은 일본의 장인정신과 비슷하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장인정신을 일컬어 잇쇼켄메이 라고 한다. 즉,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걸고 그 분야에서의 최고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을 으로 한 것이 제일모직이라고 할 수 있다.
1954년에 설립된 제일모직이 설립된 배경은 이렇다. 당시에 사회적 분위기는 돈없는 사람들에게 양복지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며 욕먹기 십상이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마카오 신사가 부유함을 상징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프라다를 입고있어야 부유함을 보여진다고 생각하는 것. 물론, 명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디자인, 원단,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 차이점이 단지 브랜드에서 오는 것이라면 브랜드의 고급성이 주는 인식의 차이만 바꾸어 놓는다면, 우리 제품도 명품이라 불리울 수 있지 않을까. 이병철도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제일모직의 브랜드를 광고하기 시작한다.
해외 유명 브랜드보다 낫다는 광고 문구를 쓰기도 하고, 직접 입기도 하고, 실제로 최고의 품질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자본과 노력을 투자하여 해외 유수의 평가 단체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병철은 제일 제당과 제일 모직의 성공으로 전국 납세액의 4%를 내는 국내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병철 개인만의 성공이 아니라, 마침내 한국 땅에서 외제 양복지를 몰아내고 국민 생활에 새바람을 불어 넣었으며, 연간 25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외화를 절약하게 되었다.
요새 우리 사회를 일컬어 세계화 시대라고 말을 한다. 외국계 기업들이 우리 기업들을 차지하고, 국민들은 국내 제품보다 외국 제품을 선호하는 등, 물론 이러한 과정들이 세계화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일방적인 세계화라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세계화란 세계 각국의 특성들이 한데 뭉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화는 서구 선진 몇몇 나라들의 문화만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것 같다. 이병철의 제일모직이 한국에서도 외국 제품 못지않은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우리들이 해야할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못만드는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역할이 아닐까?
2) 인재도 최고
이병철이 삼성물산공사를 주식회사체제로 출범하면서, 회사운영 기본방침을 밝혔다.
첫째, 일정한 자본금의 규모를 정하지 않고 사원이면 누구나 응분의 투자를 하고, 이익의 배당을 투자액에 비례해 공평하게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한다.
둘째, 사장이거나 평사원이거나 간에 공존공영의 정신으로 일에 몰두하는 것은 물론, 능력에 따른 대우와 신상필벌의 기풍을 마련한다.
셋째, 사원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운영에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우대해 가족적 분위기가 항상 유지되도록 한다.
당시 이병철은 임원들에게 25%의 출자를 하게 했다. 그 이유는 출자자들에게 회사 이익이 곧 자기 이익이므로 서로 분발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병철의 초기 회사에 대한 생각은 공존공영 이 단어일 것이다. 나만의 회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회사이니, 우리 모두를 위해 열심히 하자.
이것은 앞에서 말한 일본 경영의 신인 네셔널 그룹의 마쓰시타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일본 경제가 불황이어서 모든 회사들이 직원들을 해고할 무렵에 마쓰시타도 임원들로부터 직원들을 해고해야만 한다는 강요를 많이 받았다. 더 이상 버텼다간 회사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마쓰시타는 우리 모두의 회사이기 때문에 과실이 아닌 이상 회사를 위해 개인을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집이 어렵다고 가장이 어린 아이들을 길거리에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모든 직원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 직원들의 반나절 직장생활을 하자고 주장했다.
지금의 노동 시간 단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현재 우리 노동계가 주장하는 것이 5일 근무제이다.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인원의 절반이 반나절만 일하고 나머지 반나절은 직접 물건을 들고 파는 것이다. 그런 아주 힘든 시기를 서로 도와가며 이겨낸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마쓰시타의 희생정신은 나중에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후 대기업 해체를 명령했을 때, 마쓰시타 전기(내셔널 그룹)의 전 직원들이 매일매일 미국방에 항의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정리 해고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의 입장에서는 정리 해고는 기업의 재정상태와 관련해서 극복을 위한 가장 쉬운 지름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리 해고의 대상은 40~50대 젋은 날의 열정을 다바쳐 지금은 신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과연 이것이 공존공영의 길일까?
기업의 역할은 이윤 획득과 일자리 창출이다. 그 두가지는 어떤 것이 먼저 선행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윤 획득에 약간 지장을 줄지라도 일자리가 창출된다면 기업은 감수해야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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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암 생가 안 풍경 |
이병철의 인재 양성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이병철은 인재를 뽑기 위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채 사원을 뽑은 기업인라고 한다. 이전까지는 연고 위주로 사람을 뽑다가 `삼성의 인재는 내가 뽑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1957 년에 시행한 것이다. 당시에는 고위 관직으로부터 인사청탁이 많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채 출신과 인사청탁으로 들어온 사원과는 승진과 봉급을 다르게 했다. 승진과 봉급에서 공채출신이 연고 입사자보다 앞서도록 한 것이다. 이병철의 자존심이 발휘된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폐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삼성은 최고 일류 기업이고, 선호도 1위인 기업인 것은 사실이지만, 냉정함이 많이 엿보이는 기업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이유를 위와 같은 데서 찾는다면 웃기겠지만.
삼성 그룹의 특징 중 하나는 전문경영인 영입을 통한 경영이다. 이병철이 삼성상회를 만들어서 별표국수를 발매했을 때부터 이순근이라는 전문경영인을 쓴 것이다. 전문 경영인에게 믿고 맡기는 것이다. `못미더운 사람은 아예 쓰지 않고, 쓰거든 믿고 맡긴다.` 는 경영방침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오늘날 삼성은 과장부터 전결권을 갖고 있는 회사라고 한다.
위와 같은 경영방침은 삼성의 모든 사업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병철은 여기다 조건을 달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믿고 맡기되 따질 것은 꼼꼼하게 따진다는 것이다.
과거 삼성이 전주 제지 공장을 지을 때, 이병철은 부지의 입지 조건보다 지역사회에 대한 배려를 먼저 생각했다. 전주에 제지공장을 짓겠다고 하자, 지역 주민들이 땅을 내놓아 부지를 사들였다. 그러나 부지상의 부적합문제로 부하 직원들이 다른 지역을 물색하자, 이병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주의 입지 조건이 다른 데 비해 나쁘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게 아니오? 내가 항상 말했듯이 기업이란 눈앞의 영리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거요. 기업을 일으킬 때는 국가나 사회에 만들어 바친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야 하오. 특히 이번 제지공장은 지역사회 발전이라는 전주 시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깃들여 있는 사업이 아니오?`
이병철은 되도록 삼성의 기업방향을 자신의 가치관과 병행하여 나아가고자 했던 것 같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게 하진 못했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세가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3. 미래의 계획
1) 나와 나라가 사는 길
이병철은 6.25 후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가 재기한 일화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이병철은 평소부터 가지고 있었던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제조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어떤 제조업을 할 것인가에 대해 치밀한 사전 조사를 한 끝에 당시 우리나라에서 100% 수입품에 의존했던 설탕, 페니실린, 종이 중에서 현실적으로 이병철이 할 수 있는 설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제당에 참여를 하고자 하였으나, 막대한 자금과 기술력이 부족했다. 힘든 난관을 이겨내고 1953년 11월 5일 제일제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설탕이 생산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50 톤으로 늘어났고, 제일제당 설립 4년 째인 1956년에는 150톤, 1957년에은 200톤으로 시설이 늘어났다.
시설만 늘어날 뿐만 아니라 수요도 폭발적이어서 없어서 못팔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지경이 이르자, 주위 사람들은 설탕값을 조금만 올리면 많은 자본을 얻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으나, 이병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근당 이익이 10환이 아니라 60환이 되면 이익도 그 여섯 배가 되어 현재 80억 환의 여섯 배가 되니 모두 480억 환인데, 대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 어쩌자는 거요? 장사에도 도의가 있는 법이오. 나는 독과점업자가 되어 사리사욕만을 채울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설탕값 올리자는 의견은 없었던 걸로 합시다.`
이 같은 생각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업에서 공존공영은 늘 강조해온 것인데, 과잉경쟁을 하지말고 이익을 서로 보전하면서 연구소에서 생산비용을 낮추고, 질을 높여 이익을 소비자에게 돌려주도록 해야 한다.`
이 말은 이병철이 아랫사람들에게 늘 하달하는 업무지시 내용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홍화상의 `카리스마 VS 카리스마`에서 평한 내용이 있다.
`시장은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을 막거나 흐려놓으면 고기는 그 곳을 떠난다. 현명한 어부는 물의 흐름을 막지 않고 물을 흐려놓지도 않으면서 고기를 잡는 법이다. 시장질서를 지켜가면서 장사를 하는 것이 서로가 잘사는 지혜다.`
1967년 한국 비료 사건 이후 해외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찾고자 고심하던 터에 평소의 자세대로 치밀한 사업계획을 통해 전자산업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이병철은 전자산업의 사업성을 검토해 본 결과 기술, 노동력, 부가가치, 내수와 수출전망 등 사업 전반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경제실정에 꼭 알맞은 사업이었다.
이병철에게는 나름대로의 경영철학이 있었다. 반드시 자기 능력의 한계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업을 시작한다는 걸 철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한 철학 하에 이병철은 수원 45만평의 대지를 살 때 삼성이 부동산 사업에 뛰어든다는 비난여론을 뒤에 엎고, 1969년 1울 13일 삼성전자 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미래의 반도체 시장 전망까지 점쳤다고 한다. 그러한 미래 예측은 10여년 후인 1984년 삼성반도체 공장이 준공되면서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훌륭한 사업가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눈빛은 미래를 향한다고 했다. 세상에는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도 많고, 미래를 향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두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이는 드문 것 같다.
` 무슨 일을 시작해서 끝을 맺으려면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을 새워 밀고 나가는 것과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밀어붙여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2 ) 사업의 성공을 위한 계획
이병철은 미래를 계획할 때 두 가지를 검토한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첫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함이요, 둘째는 그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치밀한 사전조사를 으로 한 사업계획
이병철의 사업철학은 1976년 5월 (서울 경제 신문)의 `재계회고`에서 밝힌 논문으로부터 알 수 있겠다.
`사업의 착수에서 우선 국민과 인류에 필요한 것인지를 살피고, 그 다음 수익성, 자금, 인력, 기술 등을 따져 자기 능력에 맞는 사업을 전개하도록 해야한다.`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전준비와 계획이다. 당초에 계획을 잘못 세워 중도에 자금난으로 허덕인다거나 판로가 막혀 당황하게 된다면 경영자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부동산에서 실패를 본 것은 이와 같이 "경영"이 처음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이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기업 철학도 이 때 배운 것이다.`
이병철은 1987년에 이 세상의 생을 마감했다. 20년이 지난 후 우리의 경제 철학은 무엇인가? 이병철이 무의미한다고 강조했던 투기성 사업에만 너무 집착을 하는 것은 아닌가? 설령, 그 사업이 투기성 사업이 아니라 할지라도 투기성 마음은 없는 것인가? 이병철 경영철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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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 이명희 회장은 항상 부친과 동행한 덕에 본인도 모르게 생각과 행동까지 따라 하게 됐다고 말한다. |
1987년10월 20일 이병철은 안양 골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2층 창가에 앉아 잔디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서서히 날이 어두워질 무렵 이병철은 직원들에게 골프화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프로골퍼 이강선과 함께 카트를 타고 1번 홀로 나갔다. 1번 홀에 선 이병철의 첫 번째 티샷은 헛스윙이었고 두 번째 티샷도 겨우 10미터 정도 굴러갔다. 그러나 세건트 샷지점에서부터는 평상시처럼 플레이했다. 3번 홀에 이르자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못내 아쉬워하는 이병철의 마음을 읽고 주변사람들이 카트와 승용차 헤드라이트를 필드 쪽으로 밝혀주어 9번 홀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의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병철은 카트를 타고 10번 홀 그린을 세 바퀴나 돌아본 뒤 골프장을 떠났다. 이것이 이병철의 마지막 골프였다. 그리고 이병철은 20일 후인 1987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거인의 77년 생애가 끝난 것이다.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라는 명구는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던 순간까지 일관되게 흘렀던 좌우명이자 그의 행동주의적인 삶과 경영철학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가 행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가고 또 갔던 것이다.
이병철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굳이 언급하자면 철두철미함과 추진력을 겸비한 애국 기업가라 정의 내리고 싶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 모든 자료를 수집해 꼼꼼히 따져보는 철두철미함을 가지고 있지만 한번 시작하면 무서운 추진력으로 끝장을 보는 의지력의 소유자이고 중대한 결정에 있어 국가의 발전을 염두에 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경영인이었기 때문이다. 무역업으로도 큰 돈을 벌고 있었던 때에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제조업을 시작한 일이나 73세의 나이에 반도체 사업을 추진한 점은 그가 범상한 경영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여기에 더해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리더였으며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멋쟁이였다.
이병철 회장의 경영 신조
1. 신용을 금쪽같이 지켜라
2. 사람을 온전히 믿고 맡겨라
3. 판단은 신중하게, 결정은 신속하게
4.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라
5. 매모광이 돼라
6. 세심하게 일하라
7.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8. 신상필벌을 정확히 지켜라
9. 전문가의 말을 경청하라 10.사원들을 일류로 대접하라
이병철 회장의 경영 15계명
1계명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2계명 신용을 금쪽같이 지켜라
3계명 사람을 온전히 믿고 맡겨라
4계명 업의 개념을 알아라
5계명 판단은 신중하게, 결정은 신속하게
6계명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라
7계명 메모광이 되라
8계명 세심하게 일하라
9계명 신상필벌을 정확하게 지켜라 10계명 전문가의 말을 경청하라 11계명 사원들을 일류로 대접하라 12계명 부정부패를 엄히 다스려라 13계명 사원교육은 회사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14계명 목계의 마음을 가져라 15계명 정상에 올랐을 때 변신하라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라는 명구는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던 순간까지 일관되게 흘렀던 좌우명이자 그의 행동주의적인 삶과 경영철학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가 ‘행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가고 또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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