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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을산행 작성일09-05-01 09:36 조회28,083회 댓글2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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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聊無愛而無憎兮
如水如風而終我
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聊無怒而無惜兮
如水如風而終我
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혜요아이무구
료무애이무증혜
여수여풍이종아
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혜요아이무구
료무노이무석혜
여수여풍이종아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자주 접하는 이 글은 고려말의 고승인 나옹선사가 지은 한시(漢詩)입니다.
한시를 번역한 것이라 구절마다 조금 다르게 되어 보여지는 것도 있으며, 시의 제목은 시조의 경우처럼 앞 글자
를 따서 "청산은 나를 보고(靑山兮要我)" 로 통상 지칭되고 있습니다.


> 나옹선사 스토리 더보기

나옹선사 (1262-1342) 스토리;

고려 말기의 고승, 공민왕의 왕사.
나옹선사는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이며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조선건국에 기여한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나옹 혜근은 기울어가는 국운과 더불어 불교마저 쇠퇴해가던 고려 말기에 선교 양종의 통합을 통해 불교 혁신과 중흥에 힘쓰고, 무학대사의 스승으로서 조선 초기 불교의 기초를 다진 위대한 고승이다.
나옹화상의 속성은 아씨(牙氏)로서 고려 충숙왕 7년(1320)에 영해부, 오늘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에서 선관서령을 지낸 아서구와 정씨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씨란 매우 찾아보기 힘든 희성이므로 그의 본관이나 계보는 알 수가 없다.


그의 탄생에는 두 가지 설화가 전해온다.
한 가지는 어머니 정씨부인이 하루는 꿈에 금빛 찬란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 부리로 그녀의 머리를 쪼아대더니 알 하나를 품에 떨어뜨리고 가는 꿈을 꾸고 난 다음 태기가 있어 그 이듬해(1320) 정월 보름날에 나옹선사을 낳았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나옹의 아버지는 없고, 그의 어머니가 처녀 때 오이를 먹고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집안이 매우 가난해 세금을 못 냈기에 관가에 끌려가다가 진통 끝에 아이를 낳아 길가에 버렸더니 날짐승들이 날아와 날개로 보호해준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태어나 자란 나옹이 열 살쯤 되었을 때 어느 탁발승이 마을로 찾아왔다가 나옹의 관상을 보더니 절로 데리고 가 출가를 하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나옹은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들보다 총명하였고, 특히 한 가지 일에 의심을 품으면 침식을 잊고 그에 관해 몰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가 출가한 것은 20세 때 절친했던 벗의 느닷없는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토록 친했던 내 친구는 어디로 가버렸나. 죽음이란 무엇인가. 또, 삶과 죽음의 경계란 무엇인가. 젊은 나옹은 아버지에게도 묻고 마을 어른들에게도 물어보았다. 하지만 이 물음에 아무도 시원한 대답을 들려주지 못하였다. 이제 나옹에게 있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생사의 문제를 푸는 길을 찾기 위해 나옹은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나옹이 처음 찾아간 곳은 경북 문경 묘적암이었다. 당시 묘적암에는 요연선사가 머물고 있었다. 요연선사는 나옹의 청에 따라 그의 머리를 깎고 사미계를 주었다. 그리고 묘적암을 떠난 나옹은 전국의 명산 고찰과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생사의 인연에서 벗어나는 진리의 길을 찾아 헤매었다. 그렇게 하다가 오늘의 양주군 회천읍 천보산 기슭의 회암사에서 일단 발길을 멈춘 것은 출가한 지 4년 뒤인 충혜왕 5년(1344)이었다. 이곳에서 불철주야 4년간 수행 정진한 끝에 나옹은 마침내 깨달음을 얻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기는 했지만 나옹은 더욱 정진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만하지 않고 보다 깊은 불법의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중국행을 결심했다. 보다 넓은 세계로 나아가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배우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해 11월에 고려를 떠난 나옹은 이듬해 3월에 당시 원의 수도 대도(연경)로 건너갔다. 대도는 오늘의 북경이다.

 
그때 연경 법원사에는 인도에서 온 유명한 고승 지공화상이 주석하고 있었다. 지공화상은 이미 충숙왕 때에 고려를 다녀간 적이 있었다. 지공은 나옹을 문하에 거두어들였다. 그렇게 해서 나옹은 뒷날 지공의 법맥을 이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5년간 지공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하던 나옹은 충정왕 2년(1350)에 법원사를 떠나 중국 각지의 선지식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나옹이 원 순제의 명에 따라 광제선사에 주석하기 시작한 것은 공민왕 4년(1355). 그는 그곳에서 이듬해 10월에 지공선사의 법맥을 잇는 개당법회를 베풀었는데, 순제와 태자를 비롯한 원의 황실과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금란가사 등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나옹이 중국 땅에서 고려국 고승의 선풍을 한바탕 회오리바람처럼 일으키고 귀국한 것은 공민왕 7년(1358) 봄, 원나라로 건너간 지 10년만이었다. 귀국하기 전에 나옹은 법원사로 지공화상을 찾아뵙고 하직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제자가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이 옳겠습니까?”
 지공화상이 이렇게 일렀다.
 “귀국하여 삼산양수지간에 거주하면 불법이 스스로 크게 일어나리라.”

 
나옹화상은 요양을 거쳐 귀국한 뒤 평양과 동해안 지방에서 설법·교화하다가, 공민왕 9년(1360) 가을에는 강원도 평창 오대산 상두암에서 한동안 주석하였다. 이듬해에는 공민왕의 부름으로 대궐에서 설법했는데, 왕이 해주 신광사에 주석할 것을 청했다. 나옹이 사양하자 매우 실망한 공민왕이,
“대사께서 저를 버리신다면 과인도 이젠 불법에서 손을 뗄 것입니다”하였다. 나옹은 할수없이 신광사 주지를 맡았다.

 
공민왕 12년(1363) 7월에 나옹은 신광사를 몰래 빠져나와 9월에는 구월산 금강암으로 들어갔다. 이는 화상이 여러 차례 사퇴를 간청했으나 왕이 받아주지 않기에 스스로 절을 떠난 것이었다. 공민왕은 여러 차례 사람들을 보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청했다. 2년 뒤 화상은 비로소 왕의 허락을 얻어 개경을 떠났다. 그리고 용문산 등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다가 공민왕 15년(1366) 3월부터는 금강산 정양암에, 그 이듬해 가을부터는 춘천 청평사에 주석하였다. 스승 지공화상의 입적 소식을 들은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원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보암이 2년 전 지공이 입적하기 전에 부탁한 가사 한 벌과 편지 한 통을 전했던 것이다.

 
공민왕 18년(1369)에 나옹은 병으로 청평사 주지직을 사퇴하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머물다가 그 이듬해 봄에 원에서 지공화상의 정골사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회암사로 찾아가 스승의 사리에 참배하고 사리탑을 만들어 모셨다. 이어 공민왕의 청으로 개경으로 올라가 광명사에서 하안거를 한 뒤 회암사에 주석하기 시작했다. 회암사에 주석하며 나옹은 공부선의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이는 선종과 교종의 승려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이 터득한 경지를 토로하면 그 경지를 살펴 인가해주는 최고 시험관 격이었다. 공민왕은 재위 21년(1371)에 나옹을 왕사로 책봉하고 순천 송광사에 주석토록 했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나옹화상은 송광사 주지직을 사임하고 회암사로 올라왔다. 이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스승인 지공화상의 유지를 받들어 ‘삼산양수지간’인 이곳 회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화상은 제자 무학을 불러 수좌로 삼고자 했으나 무학이 이를 굳이 사양하여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었다.

 
회암사 중창불사가 끝난 것은 우왕 2년(1376) 4월이었다. 성대한 낙성법회를 열어 회향하였는데, 이로써 회암사는 지공화상·나옹화상 사제의 중창불사에 의해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 격이 되어 불교 중흥의 중심 도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나옹화상에 의한 불교의 중흥·융성을 시기한 유생들의 참소가 끊이지 않았다. 대간이 이들 유생의 뜻을 대변하여 임금에게 상주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개경)과 매우 가깝고, 남녀 신도들의 왕래가 밤낮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이로 인해 생업을 폐하는 지경에 이르니 금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우왕도 할 수 없이 나옹화상에게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밀양 영원사로 거처를 옮기도록 명했다.

 
그것은 사실상 귀양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때 나옹화상은 이미 병이 깊어가고 있었다. 명을 받은 관리들은 사정없이 길을 재촉했다. 나옹을 태운 가마가 열반문을 통해 회암사 밖으로 나가자 영문을 모르는 신도들이 대성통곡하면서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때 화상이 구슬프게 울부짖는 대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일렀다고 선각왕사비문은 전한다.
“노력하고 또 거듭 노력하라. 나로 인하여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가다가 마땅히 여흥(여주)에서 멈출 뿐이다”

 
이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없더라도 실의에 빠져 수행·정진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자신의 병이 깊어 많이 가야 여주까지밖에는 못갈 것을 이미 예측했던 것이다. 길을 떠나 한강에 이르렀는데 화상이 호송관에게 말하기를, “내 병세가 심해 가마를 탈 수 없으니 배로 가자”하여 배로 갈아타고 7일간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 문도 1천여 명이 나옹의 귀양 아닌 귀양길을 따르고 있었다 한다. 마침내 여주 땅 여강에 이르렀을 때 화상이 다시 호송관에게 이르기를, “내 병세가 중하니 이곳에서 며칠 쉬었다 가자”고 했다.

 
그렇게 하여 신륵사에 머물고 있는데 병세가 호전되기도 전에 관리들이 다시 출발할 것을 재촉했다. 나옹화상이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니라.”라고 했다. 그리고 시자들에게는, “너희를 위해 이제 열반불사를 마치겠노라”하고 법상에 좌정한 채 영원한 선정에 들었다. 당시 화상의 법랍 37년, 세수 57세였다. 나옹화상이 자신의 말대로 열반불사, 즉 입적하는 순간 그를 따르던 수많은 제자와 신도와 여주 사람들은 오색구름이 봉미산 산정을 뒤덮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평소 화상이 타고 다니던 백마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구슬피 울었다고 전한다.


신륵사 앞 여강가에서 다비를 했는데 사리 155과가 나왔다. 제자들이 계속해서 염불하니 사리는 558과로 나누어졌다. 나옹화상의 사리에서는 사흘 동안 신기한 빛이 나왔으며, 그때 불자들이 잿속에서 사리를 수습해 몰래 지니고 간 것도 부지기수라고 이색의 비문은 전한다. 또한 당시 신륵사에 있던 달여 스님이 꿈에 다비장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과 같았다고 한다. 그 용은 다비장 주변을 돌다가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튿날 사리를 배에 싣고 회암사로 모시고 가려는데 마침 수심이 얕아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비도 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 무사히 배를 띄울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달여 스님이 꿈에 본 신룡(용마)의 조화라고 찬탄했다.
 
7월 29일 회암사에 옮겨진 화상의 사리는 8월 15일에 완공된 부도에 모셔졌다. 또 그의 정골사리는 입적한 신륵사에서 우왕 5년(1379)에 따로 부도를 만들어 모셨다. 나옹화상의 입적 사실을 보고받은 우왕은 그에게 선각왕사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목은 이색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했다. 또 우왕 10년(1384)에는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하행리 묘향산 안심사에도 지공·나옹의 부도인 사리석종을 만들어 세웠는데, 그 비문 역시 목은 이색이 지었다.

 
신륵사는 국운이 기울어가던 고려 말기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뚝 몸을 일으켜 꺼져가는 법등을 다시 밝히고 생불로 추앙받으며 중생구제와 불교중흥에 앞장섰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은 당대의 대표적 고승 나옹화상이 입적한 역사의 현장이다. 신륵사는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당시의 유적이나 유물은 하나도 없다. 현재의 건물도 모두가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고, 그 이전의 것은 다층전탑, 나옹화상의 부도인 보제존자석종과 석종비, 석종 앞 석등과 대장각기비 정도이다.

 
보물 228호로 지정된 보제존자석종은 나옹화상의 부도로서 고려 우왕 5년(1379)에 조성되었다. 석종 뒤의 석종비는 보물 229호, 석종 앞의 석등도 보물 231호로 지정되었다. 신륵사 경내에는 구룡루가 있다. 나옹화상이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이 서린 누각이다.


룡루를 돌아가면 아미타삼존불을 모신 극락전이다. 신륵사는 석가여래가 아닌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신 절이므로 극락전이 금당, 곧 다른 절의 대웅전과 마찬가지이다. 극락보전 앞에는 보물 225호로 지정된 다층석탑이 있는데, 흰 대리석으로 조성한 조선시대 탑이다. 양 옆에는 선각당과 적묵당이 있다. 극락보전 왼쪽의 조사당은 지공·나옹·무학 3대 화상의 진영을 모신 곳으로 보물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룡루 앞에서 오른쪽 언덕으로 오르면 신륵사의 명물인 보물 226호 다층전탑과 보물 230호 대장각비가 서 있다. 전탑이란 돌을 깎아 세운 것이 아니라 벽돌을 쌓아 만든 불탑이다. 높이94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전탑은 현재 여주읍 중심부에서도 보여 고려시대에 이 절을 벽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보물 230호 대장각비는 우왕 8년(1382)에 이색이 선친 이곡의 유지를 받들어 나옹의 제자들과 더불어 대장각을 건립하고 대장경 1부를 봉안한 내용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그런데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의 비문을 지은 목은 이색 또한 뒷날 고려조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선 뒤 같은 신륵사에서 독배를 마시고 이승을 떠난 것은 무슨 야릇한 인연인가.

 
신륵사 오른쪽 여강가에는 나옹화상의 다비장 자리에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고, 그 곁에는 화상의 당호를 딴 강월헌이란 정자가 무심한 세월과 더불어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수를 굽어보고 있다.

 
신륵사는 나옹화상의 입적을 계기로 대대적인 중창을 보았으나 억불숭유의 조선왕조로 접어들자 유생들의 유람처로 전락하여 이내 퇴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성종 3년(1472)에 세종의 영릉을 광주 대모산에서 이곳 여주로 천장한 것을 계기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그 뒤 신륵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을 현종 12년(1671) 이후 여러 차례 재건·중수했고, 철종 9년(1858)에는 순조비 순원왕후의 시주로 다시 크게 중건했다.

댓글목록

라이팅게일님의 댓글

라이팅게일 작성일

좋은글과 시도 잘 보았는데 설명까지 있으니 좋네요.
잘 보았읍니다.

호정님의 댓글

호정 작성일

내일~부처님오신날~!!
좋은 글과 시 잘 담아갑니다.
휴일 잘 보내시구요.

미리내님의 댓글

미리내 작성일

옴마니반메흠!!!!

금송님의 댓글

금송 작성일

도사님의 시 깊고도 맑으네요.

김영주님의 댓글

김영주 작성일

노래 가사에도  봤어요....

사람사는향기님의 댓글

사람사는향기 작성일

마음에 담아갑니다.

바드리님의 댓글

바드리 작성일

좋은글 잘읽었네요...~

남풍님의 댓글

남풍 작성일

한참을 읽어씁니다.
감사..

박경자님의 댓글

박경자 작성일

감사

갯바위님의 댓글

갯바위 작성일

잘보고갑니다.감사합니다..

송정님의 댓글

송정 작성일

잘보고갑니다

하늘님의 댓글

하늘 작성일

좋은글, 사진 고맙습니다.

구절초님의 댓글

구절초 작성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운해님의 댓글

운해 작성일

아미타불^^

무명님의 댓글

무명 작성일

마음에 담아갑니다

중투복색님의 댓글

중투복색 작성일

좋은글 감사합니다....

소정님의 댓글

소정 작성일

나옹선사 이야기 잘보고 갑니다.

땅꼬마님의 댓글

땅꼬마 작성일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호하호하님의 댓글

호하호하 작성일

노래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시였군요...
나옹스님에 대한 내용도 잘 보고 갑니다...

정관성님의 댓글

정관성 작성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코스모스님의 댓글

코스모스 작성일

좋은 글 마음에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