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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동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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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원자 작성일14-12-10 23:44 조회13,291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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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동 집 이야기

 

남편의 명함 사진 하나를 찾다가 우연히 청량리 대왕코너 사진관의 겉봉투를 보고 예전에 살던 면목동 집이 생각났다. 사진 현상 17매에 340원. 한 장에 20원했네. 1969년 남편이 직접 설계하여 지은 면목동 집은 결혼과 동시 시집 생활이 시작되었기에 나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하는 많은 추억이 담긴 집이다.
 
2남 4녀의 장남한테 시집을 왔기에 ‘맏’ 자가 붙는 맏며느리였다. 시어머님, 시누이가 둘. 시동생이 있다. 거기다가 시골 큰시누님의 두 아들, 우리 아이 둘까지 더해 대식구가 살던 집이다.
 
남편은 어려서 충남 해미에서 올라와 고생 끝에 처음으로 이 집을 마련했다. 논 한가운데 지었고 그 당시 집이라야 세 채뿐이었다. 뚝방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1970년 뚝방 건너편에 철거민촌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전기가 없어 남포등과 등잔불을 켰다.
 
지금까지 잘 두었더라면 ‘진품 명품’에 한번 나가 보련만 무식하게 전기가 들어오면서 신나게 다 버렸으니 요사이 가끔 생각하면 아까운 생각이 든다. 그래도 마당이 넓어서 대문에는 등나무가 자라서 보랏빛 꽃이 송알송알 피었고 여러 가지 꽃들을 심은 화단이 예뻤다. 마당 모퉁이에 심은 쥐똥나무가 십 년이 되니 울창해 담을 덮었다. 아이들을 위해 상봉동 재래시장에서 사온 강아지, 토끼와 오리, 커다란 셰퍼드도 길렀다. 스피츠는 종일 부엌으로 마당으로 뛰어다녔다. ‘꽥 꽥’ ‘멍멍’ 매일 매일 와글와글 재미있게 지냈다.
 
그러나 화장실이 마당 한쪽 구석에 있어 밤이면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운 적이 많았다. 재래식이라 구청에서 커다란 차가 와서 퍼 갔다. 어디다 버리는지 항상 궁금했다. 어린아이들은 잔디밭에 그냥 똥을 누었는데 강아지가 쫓아다니며 이내 먹어 치웠다. 항상 느릿느릿 꾸벅꾸벅 졸던 개가 아이의 똥만 보면 얼마나 재빨랐는지 깜작 놀라 쫓았다.
 
“저놈의 개! 그러다 우리 귀한 손자 고추 물어 떨어지겠다.” 개는 시어머니를 피해 다녔다. 그 개가 커져 동네 아이를 물었다. 시어머니는 개의 털을 잘라 태워 붙여주었는데 아이 아버지가 와서 다그쳐 약값을 엄청 물어준 기억이 난다. 그 뒤로 개들은 꼭 광견병 예방주사를 꼭 맞혔다.
 
겨울이 되면 연탄가게 아저씨가 소달구지에 연탄을 가득 싣고 와서 연탄광의 천장까지 까마득하게 쌓았다. 키가 작은 새댁인 나는 위에 연탄을 까치발로 내리다가 잘못하여 연탄이 와르르 무너뜨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반쪽이 된 연탄이 아까워 부엌 아궁이에 갈아 넣었다가 연탄재가 부서지는 바람에 오히려 재를 치느라 더 애를 쓴 기억이 난다. 방에는 연탄 두 장을 넣는 바퀴가 달린 통이 있었다. 꼬챙이 고리로 걸어서 연탄을 밀어 넣고 끌어서 꺼내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신나게 ‘드르륵드르륵’ 그러다 ‘콜록콜록.’
 
큰 문제가 있었다. 지하실 방수가 잘 안 되어 비만 오면 빗물이 벽으로 스며들어 지하실에 물이 가득했다. 남편은 한발은 지하실에 한발은 계단에 다음 시동생 다음 조카랑 줄을 서서 대야로 물을 퍼냈다. 몇 해를 애쓰다 노루 표 페인트로 방수를 다시 했다. 장독대가 높아 저 멀리 동네까지 다 볼 수 있었다. 건너편 논두렁에 불이 났는데 불구경을 하러 나갈 필요가 없었다.
 
간장, 된장, 고추장, 담은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있었다. 그러나 냉장고가 없어 시아버님 제삿날에 엿기름을 걸러 장독대에 놓았다가 빗물이 들어간 적도 있고 날이 더워 삭히기도 전에 시어 버린 적도 있다. 크고 작은 예쁜 항아리들이었다. 시어머님은 그 집의 장독대 항아리를 보면 며느리가 얼마나 살림을 잘하나 알 수 있다 하여 매일 반질반질하게 항아리를 닦으라 하셨다.
 
물은 마당에 묻은 펌프로 길어 사용했다. 뜨거운 여름이면 김치가 실까 봐 찬물에 김치 통을 담가두었고 겨울에 펌프가 얼면 온 식구가 매달려 뜨거운 물로 녹이느라 동동거렸다. 김장은 배추 300포기 이상하였다. 추운 겨울날 손을 호호 불며 배추를 커다란 고무통 서너 개에다 산처럼 쌓으며 절였다. 그날 밤 한번 뒤집어 놓으면 다음날 아침이면 배추는 절어서 반으로 준다. 며칠 전부터 황새기를 다려 젓갈을 만들어 놓았고 전날에는 무채를 썰고 파, 마늘, 갓, 생강 등 갖은 양념을 넣고 버무려 밖에 내놓았다. 아침부터 돼지고기 삶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 냄새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도와준다고 한 분 두 분씩 와서 팔을 걷어 올렸다. 펌프 소리 요란하고 배추 씻는 줄이 늘어졌다.
 
배추에 물이 빠지는 동안 점심을 먹는다. 노란 속잎을 따서 소를 얹고 수육 한 점 올려 풍성한 점심으로 배를 불리고 본격적인 김장을 하기 시작한다. 버무리고 속을 넣기 무섭게 마당에 묻은 항아리 속으로 시어머님은 차곡차곡 넣었다. 가득 채워진 항아리는 비닐로 덮고 다시 그 위에 짚으로 또 덮는다. 천연 냉장고다. 봄에 이 김치 맛은 쨍하고 아삭하여 밥도둑이다. 반쯤 남았을 때는 꺼내다 항아리 속으로 거꾸러질 뻔도 했던 기억이 난다. 남은 무도 땅속에 묻고 짚으로 구멍만 내어 둔다. 무 싹이 날 봄까지 하나하나 꺼내 쇠고기뭇국을 끓였다. 동네 아이들 엄마 찾아 모여 오후는 한층 더 시끌시끌했다. 김장하는 날은 동네 잔칫날이었다.
 
그 당시는 간식이 요즈음처럼 많지 않아 밥을 많이 먹던 때였다. 밥은 밥주발 위에 곱빼기로 가득 담아 먹을 때였다. 1970년대 당시 쌀 한 가마 80kg이 4000원 했다. 재수하는 조카들 도시락도 싸고 해서 한 달에 한 가마를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많은 밥을 먹었나 싶다.
 
시어머니 환갑잔치와 우리 큰아이 돌을 같이 마당에 텐트를 치고 했다. 금반지 5돈을 해드렸다. 한 돈에 3000원했다. 주로 시골의 친척분이 오기 때문에 한 달은 손님으로 벅적거렸다. 시어머님의 언니이신 일찍 혼자 되신 이모님은 아침저녁으로 반주로 청주를 드셨다. 식사는 거르셔도 꼭 드셨다. 시어머님에게는 어머니 같은 언니셨기에 우리는 정성껏 모셨다.
 
그리고 1980년 전기가 들어오고 수도가 놓아졌다. 작은 냉장고도 사고 예쁘고 신기한 TV도 샀다. 모든 식구가 좋아서 매일 매일 행복하게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목발을 짚은 상이군인이 찾아와 보증을 서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거절했지만 하마터면 큰아이를 유괴당할 뻔했다. 또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학교 문제도 있어 겸사겸사 이사를 하기로 했다. 15년을 살고 강남 일원동으로 이사하여 여동생과 이웃으로 살았다. 오래전 한번 가본 적이 있지만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면목동 집이다. 아마도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예전의 흔적조차도 없을 것 같지만.
 

댓글목록

세모님의 댓글

세모 작성일

잔잔한 과거의 일들이 다시금 떠올려 지네요.
일상의 수필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너무 디지털식으로 변해버린 현재의 모든 것들보다
때로는 아날로그가 그리워지는군요.

청운소님의 댓글

청운소 작성일

오래간만에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항상 재미있는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백두님의 댓글

백두 작성일

잘 읽고 갑니다.~~

난아카데미님의 댓글

난아카데미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해용님의 댓글

해용 작성일

잘보았습니다.

삼족오님의 댓글

삼족오 작성일

과거가 아련한 추억으로 떠 오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